인간은 누구나 이 땅을 한 번 살면서 나름대로의 성공을 지향하며 이루며 삽니다. 이루어 놓은 일들을 돌아보며 만족해 하고 이생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기도 합니다.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영원한 세상의 그림자입니다. 이 땅에서 겪는 삶의 모습과 경험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함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. 구원받았다고 하는 신자중에서도 이 세상이 끝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. 나쁜 일을 하거나, 남을 괴롭히거나, 큰 죄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영원한 삶을 준비하지 않습니다. 오히려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보낼 수 있을까 하며 살아갑니다. 이 땅만 보고 삽니다. 하나님 나라에서 필요한 영적 자산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소통되고 있는 돈을 모으고,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위해서만 삽니다.
돈은 필요한 물질입니다. 그러나 돈은 이 세상에서만 유용합니다. 다음 세대에게 돈을 물려주기 위해 더 많이 벌려고 합니다. 과연 더 많은 돈을 자녀에게 물려준다고 해서 자녀들이 행복할까요? 자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은 돈에 더 집착하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 아닐까요? 혹시 모를 미래의 사건 사고 때문에 돈을 모은다는 사람도 있습니다. 불안한 미래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 입니다. 과연 돈이 있으면 사건 사고를 해결하고 질병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? 오히려 사건 사고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보험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을 수 있습니다. 인생에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 같지만 의외로 돈 때문에 벌어지는 걱정과 염려가 더 많습니다.
인간관계가 중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. 교제를 위해 모임에 참석해야 하고, 함께 자리하지 않으면 소외 당할까 봐 두려워합니다. 보통 인간관계는 친구관계나 혈연관계가 아니면 친목이나 이익을 추구하거나 과제를 수행하는 만남입니다. 친구나 혈연관계는 정기적으로 만나거나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. 만나서 꼭 무엇을 해야 하는 만남은 아닙니다.
친구의 만남이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면 참 좋은 관계가 됩니다. 다윗과 요나단이 믿음의 친구였습니다. 하나님은 모세를 친구에게 말하듯이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습니다. 그러나 친구관계가 해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. 악을 도모하고, 불건전한 문화에 참여하고, 이용하려고 할 때 진정한 친구관계가 아닙니다. 욥의 친구들은 욥을 잘못된 인과관계 신학으로 정죄했습니다. 그래서 욥은 ’친구라는 것들은 물이 흐르다가도 마르고 말랐다가도 흐르는 개울처럼 미덥지 못하고 배신감만 느끼게 하는구나’(욥 6:15)라고 탄식합니다. 잠언 19장 4절은 ‘재물은 친구를 많이 모으나, 궁핍하면 친구도 떠난다’라고 말합니다. 돈은 친구를 모을 수 있지만 진정한 친구관계는 돈으로 생기지 않습니다.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의 관계가 하늘나라에까지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.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한 형제가 되는 관계만이 존재합니다.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십니다. 십자가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고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십니다. -CSJ-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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